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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식이 삼촌 시대적 배경 정치 상황

by opensoop 2024. 5. 15.

1950년대 초반 부산정치파동을 거치면서 이승만 개인의 권력 기반이 확보되고 자유당의 권력이 증대되었다. 이에 따라 제1공화국의 정치는 점차 변질되기 시작했다. 헌법의 규정과 그에 따른 제도와 절차보다는 이승만 개인이나 자유당의 권력 행사가 우선시되는 모습이 나타났다.



이승만은 장기 집권을 위해 다양한 개헌 시도를 감행했다. 제2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불출마를 선언하면서도 관제 민의를 동원해 출마 압력을 조성했다. 초대 대통령의 3선을 허용하고 국민투표제를 도입하는 개헌안을 제출했고, 사사오입이라는 논리까지 동원해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이승만은 불출마 선언 후 우의마의(牛意馬意)까지 동원하며 재출마 공작을 펼쳤다. 결국 야당 후보 신익희의 서거로 이승만이 당선되었지만, 장면이 부통령에 당선된 것은 자유당에 대한 민의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후 자유당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는 점차 감소하기 시작했다. 1956년 시·읍·면장과 시·읍·면의회 선거에서 무소속과 민주당이 약진했고,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자유당과 민주당의 표 차이가 크게 줄어들었다. 특히 서울에서는 민주당이 압승을 거두고 자유당은 1석에 그쳤다.



1960년 대선을 앞두고 자유당은 야당과 언론을 탄압하기 위해 보안법 개정을 시도했다. 야당 의원들을 연금하고 법안을 날치기로 통과시키는 등 강압적인 처리 방식을 동원했다. 이는 제도를 통해 정부 비판을 봉쇄하고 다수결을 악용하는 행태의 선례가 되었다.



언론 탄압도 서슴지 않았다. 야당 성향 언론사를 폐간하거나 발행 정지 처분을 내리며 헌법상 언론의 자유를 무시했다. 이는 헌법적 보장마저 외면하는 자유당 정권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급기야 1960년 3·15 부정선거를 계기로 자유당 정권은 붕괴의 길로 접어들었다. 경찰과 자유당원들이 조성한 공포 분위기 속에 공개투표가 강행되었고, 이에 항의하는 마산 시위를 이승만이 공산당의 소행으로 매도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전국으로 확산된 반정부 시위로 결국 이승만은 하야했고, 자유당 정권은 무너졌다.



이승만 정권의 권위주의 체제 강화 과정과 부정선거로 인한 붕괴는 한국 정치사에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다수결의 악용과 제도를 통한 비판 봉쇄 등은 이후에도 한국 정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국민의 저항을 초래했던 자유당 정권의 실패는 오늘날까지도 되새겨야 할 역사적 사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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